2008년 09월 15일
숙제도 심각한 학원폭력일 수 있다.
추석이다.
이런 명절이면 학생들에게 고정레파토리처럼 내주는 숙제가 있다.
'뿌리찾기'라는 상당히 그럴듯한 명목으로 내주는 숙제다.
'본관이 어디고, 몇세손인지를 알아오시오!'
공식적으로 신분제 철폐를 얘기한 갑오개혁이 백 년도 전의 일이다.
그런데도 이놈의 나라는 아직도 '족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의 족보를 제대로 믿을 수 있기나 한가?
모든 사람이 성시를 가지게 된 때가 과연 몇 년 전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이전부터 내려오는 족보들 역시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실된 게 한둘인가?
좀 극단적인 예지만, 이런 건 어떨까?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전쟁고아로 자신의 본래 성 따윈 기억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기억하는 건 서너 살 무렵 아주 큰 집에서 시중드는 하인들이 많았단 것 뿐이라면 어떨까?
이 사람의 손자가 위에 말한 숙제를 학교에서 받아왔다.
이 사람은 자신의 손자에게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나?
아이들은 그렇다치고, 부모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정확한 족보를 알지 못하는 부모가 태반이다.
이 부모는 다른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지도 모르는데, 사실을 그대로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솔직히 이런 류의 숙제는 이미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경우에 따라 심각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까.
한심한 세상이다.
덧) 자세하게 얘기하긴 좀 뭣하지만,
내 조부와 외조부 두 분 모두 일제강점기에 상당한 친일행각을 하신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두 분 모두 어쨌거나 양반집안 자손들이긴 했으나,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조상은 천민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친구가 난 너무나 부러웠다.
덧 하나 더) 위 글을 올리고 사흘 뒤, 교육청에서 전화를 받았다.
교육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같은 내용의 글을 남겼더니,
그 답이 돌아서 내 살고 있는 천안 지역을 담당하는 교육청에서 왔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전통을 살리고, 우리 뿌리를 찾고...
운운하며 그런 숙제를 내주는 이유를 설명하더군.
그러더니 '하지만 앞으로는 세심하게 배려해서
지적하신 것과 같은 경우에 일부 아이들이 상처입지 않도록 노력' 하겠단다.
솔직히 성에 차는 회신은 아니었다.
뭘 어떻게 배려를 하더라도 본관이며 무슨파 몇 대손이며 하는 것을 물어버리면,
결국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 by | 2008/09/15 20:35 | 횡설수설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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